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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인가?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적 연결성에 대한 이해

타임트래블러 2025. 4. 24.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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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 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이후,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발해가 고구려의 후국인지에 대한 논란은 오랜 시간 학자들 사이에서 이어져 왔지만, 여러 역사적 증거와 연구를 통해 발해가 고구려를 역사적, 문화적으로 계승했다는 점이 점차 명확히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갖는 역사적 의미와 근거를 바탕으로, 두 나라 간의 연관성을 자세히 알아봅니다.


1. 고구려의 멸망과 발해의 탄생

가.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는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의 지배층과 주민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 고구려 유민들은 나당연합군의 지배를 거부하고 곳곳으로 흩어져 저항의 불씨를 이어갔습니다.
  • 안승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부흥운동(보덕국)과 같은 사례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나. 대조영의 부흥과 발해 건국

발해는 고구려 유민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약 30년 후인 698년에 건국했습니다. 당시 그는 안동도호부의 지배를 피해 고구려의 옛 영토 중 일부와 말갈족을 기반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 대조영(고왕)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연합을 통해 나라를 건국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했습니다.

2.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나타내는 증거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나타내는 여러 역사적, 문화적 증거들이 존재합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 대조영의 고구려 유민 정체성

대조영은 스스로 고구려 유민임을 자처했습니다. 발해 왕실은 고구려와 같은 지배계급인 부여계(동이족) 출신임을 내세웠는데, 이는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적 연속성을 드러냅니다.

  •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 역시 고구려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발해 초기 지배층의 주요 인물들은 고구려 유민이었습니다.

나. 국호와 연호의 유사성

발해의 초기 국호는 진(震) 또는 발해국으로 불렸습니다. 이 국호는 고구려의 옛 국호인 ‘고진’(高震)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 발해는 고구려가 사용했던 연호 시스템을 차용하여 고구려와의 연결성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다. 수도와 영토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는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성이나 국내성(지금의 중국 집안시)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세워졌습니다.

  •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대부분 포함하며 영토를 확장했으며, 이는 발해가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라. 문화적 유사성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측면이 많습니다.

  • 건축 양식: 발해의 수도 상경에서 발견된 궁전과 성곽 유적은 고구려의 건축 양식을 계승했습니다.
  • 문양과 상징: 발해의 깃발에서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 문양이 사용된 사례는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졌음을 증명합니다.

마. 국제적 인정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국이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와 일본 등의 외국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후속 국가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일본의 기록인 『속일본서기(續日本書紀)』에서는 발해를 고구려로 언급하며, 발해 왕을 ‘고왕(高王)’으로 기록했습니다.
  • 당나라 또한 발해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인정하며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3. 고구려와 발해의 공통점과 차이점

가. 공통점

  1. 지배계급의 혈통

    고구려와 발해 모두 지배계급은 부여계 동이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2. 사회 계층 구조

    두 나라 모두 말갈(만주족의 선조)과 같은 이민족들로 구성된 피지배계급과 자국민 지배층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3. 문화와 생활 방식

    발해는 고구려의 복식, 언어, 종교 및 전통문화를 대부분 계승했습니다.

나. 차이점

  1. 왕권의 혈통

    고구려는 주몽과 그 후손들이 왕위를 이었지만, 발해는 대조영과 그의 후손들이 통치했습니다.
  2. 지리적 범위

    발해는 고구려보다 동쪽(현재의 연해주)으로 영토가 확장된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3. 외교 정책

    발해는 고구려와 달리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보다 융화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전략적인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4. 발해의 역사적 의의

가. 고구려 유민의 새로운 시작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을 중심으로 등장한 국가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의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나. 동북아시아의 중심국가로 성장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정도로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강대국으로 성장했으며, 이는 고구려의 전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 한민족의 북방사적 자산

발해는 고구려의 역사적 계승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자산으로서 의미가 큽니다.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의 후국을 넘어 우리 민족의 북방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국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5. 발해와 고구려 계승 논란의 현대적 시사점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은 발해를 중국사로 귀속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한민족 중심의 국가로서 존재했다는 점은 수많은 역사적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인정하고, 이를 강조하는 것은 한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지키는 데 필수적입니다.
  •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적 연속성: 발해를 통해 한반도와 만주의 역사적, 문화적 연결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공식사이트
  2.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고구려와 발해 관련 기록)
  3. 이희진, 『발해와 고구려: 계승의 역사성』
  4. 일본 『속일본서기』 외국전 발해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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